
화가 · 19세기
제임스 맥닐 휘슬러
James McNeill Whistler · 1834–1903
미국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배우고 런던에서 이름을 떨친 화가로, 그림을 음악처럼 색의 어울림으로 봐 달라며 비평가와 법정에서까지 맞선 사람이에요.
생애 장면
제임스 맥닐 휘슬러의 삶,
장면으로 따라가기
- 1845상트페테르부르크
열한 살 미국 소년이 러시아 황제의 도시에서 미술 학교 문을 열고 들어가요. 아버지 조지 워싱턴 휘슬러는 철도 기술자였어요. 황제 니콜라이 1세가 그를 불러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를 잇는 철길을 맡겼고, 가족도 따라와 살았어요.
제임스는 집에서 가까운 황립 미술 아카데미의 수업에 다녔어요. 하지만 1849년 아버지가 콜레라로 세상을 떠났어요. 어머니 애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돌아갔어요.
- 1854웨스트포인트와 워싱턴
1854년 여름, 휘슬러가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에서 쫓겨나요. 아버지가 나온 학교였지만, 그는 화학에서 낙제했고 벌점도 너무 많이 쌓였어요. 그래도 그림 수업에서만은 뛰어났어요.
그해 11월 그는 워싱턴의 해안측량국에 일자리를 얻어요. 당시 국방장관 제퍼슨 데이비스가 그를 만나 보고 이 자리를 권했어요. 하루 일당은 1달러 50센트였고, 그는 여기서 지도를 동판에 새기며 에칭을 처음 제대로 배웠어요. 그러나 출근이 들쭉날쭉했고, 몇 달 만에 그만두었어요. 이듬해 그는 그림을 배우러 파리로 떠났어요.
- 1863파리
1863년 5월 15일, 파리에서 아주 이상한 전시회가 문을 열어요. 공식 살롱에서 떨어진 그림만 모은 낙선전이에요. 거기에 흰 드레스를 입은 젊은 여자가 털가죽 깔개 위에 선 커다란 그림이 걸렸어요. 휘슬러의 「흰옷의 소녀」였어요.
모델은 그의 연인 조애나 히퍼넌이었어요. 이 그림은 한 해 전 런던 왕립 아카데미에서도 거절당했고, 이해 파리 살롱에서도 떨어졌어요. 두 번 거절당한 그림이 낙선전에서 많은 사람의 눈길을 끌었어요.
- 1871런던 첼시
1871년, 템스강가 첼시의 화실에 와야 할 모델이 오지 않아요. 휘슬러는 함께 살던 어머니 애나에게 대신 서 달라고 했어요. 어머니는 처음에 서서 모델을 섰지만 너무 힘들었어요. 그래서 그는 어머니를 의자에 앉히고 옆모습을 그렸어요.
이 그림이 「회색과 검정의 배열」, 흔히 휘슬러의 어머니라고 부르는 초상이에요. 이듬해 왕립 아카데미에 걸렸어요. 같은 무렵 그는 밤의 강과 바다를 그린 그림들에 녹턴이라는 이름을 붙이기 시작했어요. 「녹턴: 파랑과 금색 — 사우샘프턴 해협」에서는 잿빛 어둠 속에 주황빛 달 하나와 수평선의 노란 불빛 몇 점만 남아요.
이때 그린 그림녹턴: 파랑과 금색 — 사우샘프턴 해협 - 1876런던
1876년, 휘슬러는 리버풀의 선주 프레더릭 레일랜드가 런던 집에 마련한 식당에 매달려 있어요. 중국 청화백자를 늘어놓으려고 꾸민 방이었어요. 집주인이 자리를 비운 사이, 그는 벽과 천장을 청록색과 금색 공작 무늬로 덮어 나갔어요. 레일랜드는 자기와 의논도 없이 일을 이렇게 키웠다고 못마땅해했어요.
휘슬러는 2,000기니를 달라고 했어요. 레일랜드는 그 절반만, 그것도 화가에게 주는 기니가 아니라 장사꾼에게 주는 파운드로 치렀어요. 1877년 초 휘슬러는 식당 벽에 서로 싸우는 공작 두 마리를 그려 넣었어요. 한 마리의 발밑에는 동전이 흩어져 있어요. 이 방은 공작의 방이라 불리게 되었어요.
- 1878런던
1878년 11월, 런던 법정에서 화가가 비평가를 상대로 재판을 벌여요. 한 해 전 존 러스킨이 휘슬러의 녹턴 한 점을 두고 관객의 얼굴에 물감 단지를 내던졌다고 썼기 때문이에요. 러스킨 쪽 변호사가 이틀 만에 그린 그림에 200기니를 받느냐고 묻자, 휘슬러는 평생 쌓은 앎의 값이라고 답했어요.
배심원은 휘슬러의 손을 들어 주었어요. 하지만 손해 배상은 겨우 1파딩, 가장 작은 동전 한 닢이었어요. 소송비와 새로 지은 집의 빚이 겹쳐 그는 1879년 5월 파산했어요. 첼시에 새로 지은 하얀 집을 잃었고, 살림은 경매에 부쳐졌어요.
- 1879베네치아
빈털터리가 된 휘슬러에게 런던의 화상 파인 아트 소사이어티가 일을 맡겨요. 베네치아에 가서 석 달 동안 에칭 열두 점을 만들어 오라는 주문이었어요. 그는 1879년 9월 베네치아에 닿았어요.
석 달은 열네 달이 되었어요. 그는 이름난 궁전 풍경보다 좁은 운하와 어두운 문간, 골목의 사람들을 동판에 새겼어요. 1880년 11월 런던에 돌아왔을 때 그의 손에는 베네치아 에칭이 쉰 점쯤 있었어요. 그해 12월 그중 열두 점이 파인 아트 소사이어티에서 전시되었어요.
- 1894파리
1894년, 시카고의 변호사 아서 제롬 에디가 파리 노트르담데샹 거리의 화실로 휘슬러를 찾아와요. 에디는 한 해 전 시카고 세계 박람회에서 휘슬러의 그림을 보고, 초상화의 모델을 서려고 일부러 파리까지 건너왔어요. 두 사람은 그 뒤 오래 친구로 지냈어요.
그 무렵 휘슬러는 마침내 인정받고 있었어요. 1891년 프랑스 정부가 어머니의 초상을 4,000프랑에 사들였어요. 1888년에 결혼한 아내 베아트리스는 1896년 암으로 세상을 떠났어요. 휘슬러는 1903년 7월 17일 런던 첼시에서 숨을 거두었고, 치즈윅에 있는 아내의 무덤에 함께 묻혔어요. 에디의 초상은 갈색 어둠 속에 얼굴과 흰 깃, 모자를 든 손만 밝게 떠올라요.
이때 그린 그림살색과 갈색의 배열: 아서 제롬 에디의 초상
남긴 말
No. I ask it for the knowledge I have gained in the work of a lifetime.
아니요. 저는 평생의 작업에서 얻은 앎의 값을 받는 겁니다. (1878년 러스킨 재판에서, 이틀 만에 그린 그림 값을 묻는 변호사에게)
함께한 사람들
- 애나 맥닐 휘슬러어머니예요. 런던에서 아들과 함께 살며 가장 유명한 초상의 모델이 되었어요.
- 조애나 히퍼넌1860년대의 연인이자 모델로, 「흰옷의 소녀」 속 여인이에요.
- 프레더릭 레일랜드리버풀의 선주이자 후원자였지만, 공작의 방 값을 두고 크게 다퉜어요.
- 존 러스킨녹턴을 깎아내린 비평가로, 휘슬러가 명예훼손으로 고소했어요.
- 베아트리스 휘슬러1888년에 결혼한 아내로, 그녀 자신도 그림을 그렸어요.
- 아서 제롬 에디시카고의 변호사이자 수집가로, 초상화를 부탁한 뒤 친구가 되어 휘슬러를 기억하는 책을 썼어요.
작품
평예재에 걸린
제임스 맥닐 휘슬러의 그림
제임스 맥닐 휘슬러의 그림 속 숨은 이야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