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rtrait of Jean Honoré Fragonard에 그려진 얼굴

화가 · 18세기

장오노레 프라고나르

Jean Honoré Fragonard · 1732–1806

남프랑스 그라스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사랑 이야기와 정원, 빠른 붓질의 초상을 그렸고, 혁명의 시대에는 루브르 미술관 일을 맡았던 화가예요.

74살았던 해
18주로 그린 세기

생애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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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오노레 프라고나르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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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752파리

    스무 살의 프라고나르가 로마상 경연에 그림을 내요. 로마상은 왕립 아카데미의 젊은 화가가 국비로 로마에 유학하는 길이었어요. 그런데 그는 아카데미의 정식 학생이 아니었어요. 스승 프랑수아 부셰가 나서서 경연에 나가 보라고 권했어요.

    결과는 1등이었어요. 상을 받은 그림은 「우상에게 제물을 바치는 여로보암」이었어요. 그 앞에는 짧게 샤르댕의 화실을 거쳤고, 그다음 부셰 밑에서 일을 배웠어요. 상을 받은 뒤에는 카를 반 루가 이끄는 왕립 장학생 학교에서 세 해를 더 공부하고, 1756년 로마로 떠났어요.

  2. 1760티볼리

    그해 7월과 8월, 프라고나르는 로마 동쪽 언덕 마을 티볼리의 빌라 데스테에서 몇 주를 보내요. 그림을 좋아하고 판화도 새기던 생농 신부가 이 젊은 장학생을 불러 준 덕분이었어요. 오래 손질하지 않아 우거진 정원, 분수와 계단, 키 큰 측백나무가 있는 곳이었어요.

    그는 붉은 분필로 그 정원을 쉬지 않고 그렸어요. 로마에서는 한 살 아래 화가 위베르 로베르와 함께 폐허와 들판을 그리러 다녔어요. 1761년 프라고나르는 생농 신부와 함께 북이탈리아 도시들을 둘러보며 파리로 돌아왔어요.

  3. 1765파리

    3월 30일, 프라고나르는 커다란 그림 한 점으로 왕립 아카데미의 준회원이 돼요. 고대 이야기를 그린 「칼리로에를 구하려고 자신을 바친 코레수스」예요. 가로 4미터쯤 되는 이 그림은 그해 8월 살롱 전시에 걸려 큰 화제가 되었어요.

    왕은 이 그림을 고블랭 직물 공장의 태피스트리 밑그림으로 쓰겠다며 사들였어요. 비평가 디드로는 살롱 평에 이 그림을 두고, 플라톤의 동굴에서 꾼 꿈 이야기처럼 길고 공들인 글을 썼어요. 그러나 프라고나르는 그 뒤 아카데미가 높이 치는 역사화의 길을 계속 가지 않았어요.

  4. 1767파리

    그해 10월, 극작가 샤를 콜레가 일기에 묘한 주문 이야기를 적어요. 한 궁정 귀족이 애인이 그네를 타는 그림을 원했는데, 그 주문은 처음에 그해 살롱에서 이름을 떨친 화가 두아양에게 갔어요. 두아양이 거절했고, 일기를 쓸 무렵에는 이미 프라고나르가 그 그림을 그리고 있었어요. 그 그림이 오늘 런던 월리스 컬렉션의 「그네」로 여겨져요.

    이 무렵 그는 붓을 거칠게 휘두른 반신상도 그렸어요. 「의상을 입은 남자의 초상」 속 남자는 검은 모자를 쓰고 넓은 깃 위로 턱수염을 내밀었어요. 오른쪽에서는 붉은 손을 번쩍 들어 올렸어요. 이마에는 크림색 물감이 두껍게 얹혀 붓이 지나간 길이 그대로 보여요.

    이때 그린 그림의상을 입은 남자의 초상
  5. 1769파리

    6월 17일, 서른일곱 살의 프라고나르는 마리안 제라르와 결혼해요. 신부는 그의 고향 그라스에서 향수를 증류하던 집안의 딸로, 그녀도 그림을 그렸어요. 그해 딸 로잘리가 태어났어요. 몇 해 뒤에는 처제 마르그리트 제라르가 파리의 이 집에 와서 형부에게 그림을 배우고 곁에서 일을 도왔어요.

    이 무렵 그는 아는 사람들에게 옛 시대 옷을 입혀 빠르게 그린 초상들을 남겼어요. 「개와 함께 있는 마리 에밀리 쿠아녜 드 쿠르송」에서 여인은 진주를 감은 머리를 높이 틀어 올리고, 하얀 강아지를 번쩍 든 채 우리 쪽을 흘끗 봐요. 강아지 목의 푸른 리본은 화면 아래까지 구불구불 늘어져요.

    이때 그린 그림개와 함께 있는 마리 에밀리 쿠아녜 드 쿠르송
  6. 1773루브시엔과 이탈리아

    1773년, 루이 15세의 총애를 받던 뒤바리 부인이 프라고나르에게서 큰 그림 네 점을 돌려보내요. 루브시엔에 새로 지은 별관을 꾸미려고 주문한, 젊은 연인들의 사랑 이야기 연작이었어요. 부인은 그 자리를 새 고전풍으로 그린 조제프마리 비앵의 그림으로 채웠어요. 왜 거절했는지는 지금도 알려져 있지 않아요.

    그해 10월 프라고나르는 아내와 함께 부유한 세금 징수 청부인 베르주레 드 그랑쿠르를 따라 다시 이탈리아로 떠났어요. 로마와 나폴리를 거치는 거의 한 해의 여행이었고, 베르주레는 여행 일기를 썼어요.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두 사람은 여행 중 그린 소묘가 누구 것인지를 두고 다투었고, 그 다툼은 결국 법정까지 갔어요.

  7. 1790그라스

    혁명이 일어난 이듬해, 프라고나르는 가족과 함께 고향 그라스로 내려가요. 짐 속에는 뒤바리 부인이 돌려보낸 네 점의 그림이 있었어요. 그는 거의 스무 해 동안 이 그림들을 팔지 않고 간직했어요. 두 해 전인 1788년에는 열여덟 살이던 딸 로잘리를 잃었어요.

    그라스에서 그는 사촌 알렉상드르 모베르의 집 거실에 네 점을 걸고, 한 해 동안 열 점을 더 그려 방 하나를 다 채웠어요. 이 그림들은 그 집안에 백 년 넘게 남아 있다가 1898년에 팔렸고, 1915년 뉴욕의 수집가 헨리 클레이 프릭이 사들였어요. 지금 뉴욕 프릭 컬렉션의 프라고나르 방이에요.

  8. 1806파리

    파리로 돌아온 프라고나르를 도운 사람은 혁명기 화단을 이끌던 화가 자크루이 다비드였어요. 다비드의 도움으로 그는 루브르에 집을 얻고, 막 문을 연 국립 미술관의 관리 일을 맡았어요. 오늘의 루브르 박물관이 첫걸음을 떼던 때예요.

    1806년, 그는 루브르의 집에서 나가야 했어요. 그해 8월 22일 그는 일흔넷의 나이로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고, 그 죽음은 거의 주목받지 못했어요. 단숨에 그린 듯한 그의 반신상 두 점은 지금 시카고 미술관과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걸려 있어요.

함께한 사람들

  • 프랑수아 부셰스승이에요. 아카데미 학생이 아니던 제자에게 로마상 경연에 나가 보라고 권했어요.
  • 위베르 로베르로마에서 함께 폐허와 들판을 그린 가까운 친구예요.
  • 생농 신부1760년 여름 그를 티볼리의 빌라 데스테로 불러 준 후원자예요.
  • 마리안 제라르1769년에 결혼한 아내로, 그라스 출신이고 그녀도 그림을 그렸어요.
  • 마르그리트 제라르아내의 동생으로, 파리의 집에서 형부에게 그림을 배운 화가예요.
  • 자크루이 다비드혁명기에 그가 루브르에 집과 미술관 일자리를 얻도록 도운 화가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