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이 남은 그림은 아직 찾지 못했어요. 대신 이 화가의 다른 그림들

화가 · 15세기

한스 멤링

Hans Memling · 1465–1494

독일 땅에서 와 플랑드르의 무역 도시 브뤼허에 자리 잡고, 이탈리아 은행가와 병원 수도자, 젊은 브뤼허 사람의 얼굴과 기도를 가는 붓으로 담은 화가예요.

29살았던 해
15주로 그린 세기

생애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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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멤링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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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465브뤼허

    1465년 1월 30일, 브뤼허 시청의 시민 명부에 낯선 이름이 하나 올라가요. 얀 판 밈넬링허. 명부에는 그가 태어난 곳도 적혔어요. 마인강 가의 작은 도시 셀리겐슈타트예요.

    시민이 되어야 이 도시에서 공방을 열고 화가로 일할 수 있었어요. 이 기록이 플랑드르에 남은 멤링의 첫 흔적이에요. 바로 전 해, 브뤼셀의 이름난 화가 로히어르 판 데르 베이던이 세상을 떠났어요. 많은 학자는 멤링이 그 공방에서 일하다 브뤼허로 왔다고 봐요.

    이 무렵의 「수태고지」를 보세요. 창 위 둥근 유리에 열쇠 두 개가 엇갈린 방패가 있어요. 그림을 주문한 집안의 표시로 보는 무늬예요.

    이때 그린 그림수태고지
  2. 1470브뤼허

    브뤼허의 메디치 은행 지점을 맡은 피렌체 사람 톰마소 포르티나리가 1470년에 결혼해요. 신부는 고향 피렌체의 바론첼리 집안 딸 마리아였어요. 신랑은 마흔 살 남짓, 신부는 열네 살 무렵이었어요.

    부부는 멤링에게 기도하는 모습을 그려 달라고 했어요. 두 장의 나무판에 남편과 아내가 따로 들어가 있어요. 남편 손가락의 금반지, 아내 목에 걸린 진주와 금실 목걸이를 찾아보세요. 마리아의 머리 뒤로 늘어진 얇은 베일 너머로는 나무 틀이 비쳐 보여요.

    이때 그린 그림톰마소 포르티나리와 마리아 포르티나리
  3. 1473북해

    1473년 4월, 브뤼허를 떠나 이탈리아로 가던 갤리선 산 마테오호가 바다에서 습격을 받아요. 덮친 배는 단치히(지금의 폴란드 그단스크)의 사략선 선장 파울 베네케의 배였어요.

    배에 실린 짐 가운데 멤링의 큰 세 폭 그림 「최후의 심판」이 있었어요. 메디치 은행 브뤼허 지점의 안젤로 타니가 피렌체 근처 바디아 피에솔라나의 예배당에 걸려고 주문한 그림이었어요. 그림은 피렌체에 끝내 닿지 못했어요. 단치히의 성모 마리아 성당에 들어갔고, 지금도 그단스크 국립 미술관에 있어요.

  4. 1479브뤼허 성 요한 병원

    1479년, 브뤼허의 성 요한 병원 높은 제단 위에 멤링의 큰 세 폭 제단화가 올라가요. 원래 틀에는 그의 이름과 1479년이라는 해가 적혀 있어요. 가운데에는 세례자 요한과 복음사가 요한이 성모자 곁에 서 있어요.

    그림을 주문한 사람들은 병원을 꾸려 가던 수사와 수녀들이었어요. 날개 판을 닫으면 바깥쪽에 수사 두 사람과 수녀 두 사람이 수호성인과 함께 무릎을 꿇고 있어요.

  5. 1480브뤼허

    1480년, 브뤼허는 프랑스와의 싸움에 쓸 돈을 시민들에게 빌려요. 돈을 낸 부유한 시민들의 명단에 멤링의 이름도 올랐어요.

    열다섯 해 전 낯선 땅에서 온 화가가 이제 도시의 넉넉한 집주인이 된 거예요. 그는 이 무렵까지 안나 더 팔케나러와 결혼했고, 두 사람 사이에 아이 셋이 있었어요.

    이 무렵 그린 다른 「수태고지」에서 마리아는 무릎을 꿇지 않고 선 채로 두 천사의 부축을 받아요. 뒤쪽 장 위에는 물이 반쯤 담긴 유리병과 놋쇠 촛대가 놓였어요.

    이때 그린 그림수태고지
  6. 1487브뤼허

    1487년, 아내 안나가 세상을 떠나요. 멤링에게는 세 아이가 남았어요.

    같은 해 스물세 살의 젊은 브뤼허 사람 마르턴 판 니우엔호버가 멤링에게 두 폭 그림을 주문해요. 한쪽에는 성모자가, 다른 쪽에는 손을 모은 마르턴이 있어요. 그림 틀에는 마르턴이 이 그림을 만들게 했다는 글과 함께 1487년이라는 해와 그의 나이 스물셋이 적혀 있어요. 이 그림은 지금도 성 요한 병원 안 미술관에 있어요.

  7. 1489브뤼허 성 요한 병원

    1489년 10월 21일, 성 요한 병원에서 엄숙한 의식이 열려요. 성녀 우르술라의 유골을 새 함에 모시는 날이었어요.

    함은 작은 고딕 성당 모양의 나무 상자예요. 멤링은 그 옆면에 우르술라가 처녀들과 함께 배를 타고 쾰른과 바젤을 거쳐 로마로 순례하고, 돌아오는 길에 쾰른에서 목숨을 잃는 이야기를 여섯 장면으로 그렸어요. 이 함은 지금도 그 병원 건물에 있어요.

  8. 1494브뤼허

    1494년 8월 11일, 멤링이 브뤼허에서 세상을 떠나요. 브뤼허의 공증인 롬바우트 더 도퍼러가 자기 일기에 이 일을 적었어요.

    일기에는 그가 마인츠에서 왔고 성 힐리스 성당에 묻혔다고 적혀 있어요. 사람들이 그를 그때 그리스도교 세계 전체에서 가장 솜씨 좋은 화가로 일컬었다는 말도 남겼어요.

    그의 그림은 그 뒤 바다를 건너 흩어졌어요. 포르티나리 부부의 초상은 1913년, 클뤼니 집안의 열쇠 무늬가 남은 「수태고지」는 1917년, 선 채로 부축받는 마리아의 「수태고지」는 1975년에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왔어요.

함께한 사람들

  • 로히어르 판 데르 베이던브뤼셀의 화가로, 많은 학자가 멤링이 그의 공방에서 일했다고 봐요.
  • 톰마소 포르티나리메디치 은행 브뤼허 지점을 맡은 피렌체 사람으로, 아내와 함께 멤링에게 초상을 맡겼어요.
  • 마리아 바론첼리1470년 톰마소와 결혼한 피렌체 여인으로, 남편과 짝을 이룬 초상의 주인공이에요.
  • 안젤로 타니같은 메디치 은행 지점의 사람으로, 바다에서 빼앗긴 「최후의 심판」을 주문했어요.
  • 안나 더 팔케나러멤링의 아내로, 세 아이를 남기고 1487년에 세상을 떠났어요.
  • 마르턴 판 니우엔호버1487년 스물세 살에 멤링에게 두 폭 그림을 주문한 브뤼허 사람이에요.